2011/09/24 06:56

과학과 종교의 공존 성큼칼럼

요즘 인문사회 밸리를 보니 종교 논쟁이 따끈따끈한 분위깁니다. 저는 물리학을 전공했고 불교와 기독교를 약간씩 체험하기도 해서 나름 결론내린 부분들도 있고 해서 제 관점을 공유해드릴까 하고 간만에 포스팅을 해 봅니다.

과학과 종교는 비록 그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주목적이 많이 다릅니다. 과학은 자연과 사회를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고 앞일을 예측해보는 게 주목적이죠. 종교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해지는 길인가를 다룹니다. 비행기 날개를 어떻게 만들면 비행기가 날 수 있는지 종교가 알려주는 건 없습니다.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지낼 때의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과학이 알려주지 않아요.

과학과 종교, 특히 기독교가 충돌하는 이유는 주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원래 아주 극단적인 개신교 종파 일부의 입장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고 하시면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죠. 직설적으로 설명한 걸 누가 듣고 따르지 못해서 죄가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해서 배려하신겁니다. 예수님이 이러하신데, 다른 성경 저자들도 충분히 비유를 써서 설명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 개신교 사회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만 신실한 크리스쳔 대접을 받는 분위기가 있죠.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을 받아들이는 데에 노력을 덜 기울이겠다는 나태한 자세이기도 하죠.

문자 그대로 해석하다보니 과학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창세기가 특히 문제되죠. 이를 설명해보겠다고 창조과학 같은 무리수를 꺼내듭니다. 과학자들과 과학적 소양을 지닌 신자 아닌 분들의 어그로를 많이 끌어왔습니다.

한편으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읽는 건 반대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무슨 황당하고 비과학적인 내용이란 말인가! 집어치워라! 라고 하는 거죠. 이런 태도는 종교의 목적, 기독교의 목적을 오해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보면 재밌습니다.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번뜩이는 비유와 상징들이 가득하거든요. 창세기의 낙원 추방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낙원에서 추방되었죠. "이러이러하게 하는 것이 선하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낙원에서 추방됩니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된다"라고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걸 보면 화가 납니다. 자기가 길에 쓰레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우울해지죠. 이렇게 선악을 분별하다보면 분노와 우울을 왔다갔다하면서 괴로워집니다. 성경에서는 이걸 무려 '원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현재 낙원에 살지 못하는 것은 먼 조상의 죄에 연좌제로 걸려서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 선악을 분별하는 원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볼 때 기독교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진짜 중요한 내용은 무척 가치있습니다. 불교도 똑같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로 전하려는 시도. 부처님이 반평생동안 전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고 노력하셨죠. 놓치긴 좀 아깝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에 관해 제가 이해하고 경험한 바를 공유해볼 생각입니다.

그럼... 


한 줄 요약: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태도를 벗어나는 게 실마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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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해정 2011/09/24 09:49 # 답글

    불교의 경우에는 붓다의 추종자들이 종교로 만든감이 있다더군요. 그냥 붓다학 으로 철학의 한파트처럼 했으면 좋았을텐데
  • 성큼이 2011/09/26 06:58 #

    불교는 지적인 레벨을 넘어서기 위한 수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단순히 지적인 레벨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철학으로는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요리를 만들어서 맛을 보는 것과, 그냥 요리 레시피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죠. 불교가 지금 같은 체제로 발전해오지 않았으면 금방 대가 끊겼을겁니다.
  • 청풍 2011/09/25 02:12 # 답글

    그런데 선악을 구별하는게 죄라면, 선악을 생각않고 마음내키는대로, 혹은 본능대로 살면 되는건가요
  • 성큼이 2011/09/26 07:11 #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환상이고 '나'와 '남'을 구분짓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결과라고 봅니다. 수행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하게 된다고 합니다. 즐거운 사람을 보면 같이 즐거워하고 슬픈 사람을 보면 같이 슬퍼하고 목마른 사람을 보면 마실 걸 주고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을 걸 주게 되는게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이라는 거죠.

    기독교에서도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오만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이끌림대로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황금률을 지킬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애써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죠.

    기본적으로는 이런 행동양식은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는 게 맞습니다만, 표면적인 충동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한 충동을 따르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민물고기가 헤엄도 안 치고 하류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과 상류를 향해 헤엄치는 차이랄까요?
  • 청풍 2011/09/26 21:18 #

    그런데 말씀하신 비유에 따르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를 보고 화가 나지 않거나 자신이 쓰레기를 버리게 된다 해도 우울해 하지 않게되거나, 혹은 않아야 한다는 말 같습니다만, 댓글의 내용은 그와 좀 다른듯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론, 댓글의 내용에서 말하시는건 비단 기독교 뿐 아니라 노장사상에서도 일부 드러나는 순리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이나 공자께서 말하신 측은, 수오, 시비지심등과 같이 인간 본연의 성선설적인 올바름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인도라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성선설적 올바름으로 봐도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를 보면 좋지 않은 기분이 들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원 글에서 등장한 기본적인 선악분별은 어떻게 해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게 아니라면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신의 선악개념은 인간의 선악개념과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겠죠.
  • 성큼이 2011/09/26 23:41 #

    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걸 보고 화가 나는 건 자기가 선악을 분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을 교만하게 스스로 판단분별하고 있는 거죠. 원죄를 저지르고 있어서 마음의 평안이 없는 상황이 됩니다. 자기가 스스로 애써보는 걸로는 이런 판단 분별과 분노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오직 신의 은혜로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기독교적인 관점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쓰레기 버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람 입장이 내 입장처럼 잘 이해되고 따라서 분노는 잠잠해지고 쓰레기가 길에 있는 게 싫으면 그냥 직접 치우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노장 사상의 무위자연 등등도 모두 같은 레벨의 이해와 깨달음을 담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 청풍 2011/09/26 23:50 #

    그러니까 바뀐게 없습니다. 말씀하신 상태는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하는 자세지 선악구별이 없는 상태가 아니거든요. 그 쓰레기를 자신이 치우는 행동을 봐도, 쓰레기를 버리는것이 좋지 않다는것은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죠.

    잘못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태도 자체는 좋은데, 그게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말로는 연결되지가 않는듯 합니다. 선악 구별이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를 보고도 그게 잘못인지도 모를뿐 더러 그게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울 생각도 들지 않겠죠.

    다시 말해서, 선악구별이 없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되어도 혼돈의 카오스가 될 뿐입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인식 자체가 무너지는걸요. 님이 설명하고자 하는 상태는 선악의 구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을 행하려 하지 않아도 선이 몸에 배는 상태입니다. 이것과 구별을 하지 않는것은 엄연히 다른 상태지요.
  • 성큼이 2011/09/27 01:13 #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과 "거리가 깨끗한 것을 보고 싶다."라는 이끌림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치우는 건 많이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마음의 평안이 그대로 유지되거든요.

    사회로부터 주입된 선악 개념을 가지고 스스로 직접 하는 선악 구별을 내려놓으면, 이제 기독교식으로 표현했을 때, "내 마음대로 행동하기" vs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동하기"의 구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후자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세상이 곧 예수님이 재림한 세상이 되겠지요.

    다만 이 두 가지를 구분짓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고 이에 대한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기독교의 종교 활동 핵심에 해당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맛보고 체험하게하고 점점 더 강력하게 이쪽을 선택할 수 있도록 훈육하는거죠.
  • 청풍 2011/09/27 21:22 #

    마음이 편하게 유지된다는것은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선악의 경계가 없는 상태는 아니라고 말하는것입니다. 다시말해 선악의 구분은 있는데, 악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겠죠.

    그 두가지의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알기로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 역시 일반적인 도덕관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성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그게 어떤 종교, 철학의 성인이든) 가장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힌 사회적 도덕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압니다. 대표적으로 자기희생, 타인을 위한 삶 등이죠.

    오히려 저같은 입장에서는 성령이라는 외적 존재의 개입, 혹은 그에 대한 의존으로 생기는 도덕성보다 개인이 왜 도덕적인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또 그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도덕성을 훨씬 더 가치있게 칩니다.
  • 성큼이 2011/09/27 23:21 #

    1) 선악을 구분짓는 것은 생각으로 하는 겁니다. 기독교, 불교, 도가에서 추구하는 것은 생각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입니다. 유교 쪽은 생각과 교육으로 선악을 분별하면서 선을 추구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쪽은 공부가 부족해서 확실하진 않네요.

    2) 생각을 기반으로 행동을 취하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비유하자면 걸음을 걸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걷는 게 아니라, 몸의 무게 중심을 오른쪽으로 기울이겠어. 그 다음으로 왼발을 들어야지. 무게 중심을 앞으로 기울이겠어. ... 등등으로 이어지는 생각을 기반으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3) 성령은 외적 존재의 개입이라기 보다는 우리 각 사람이 창조될 때 함께 짜넣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창세기에서는 사람을 창조할 때 신의 형상을 본따 창조했다고 합니다. 또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들은 바 없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안에 율법이 짜넣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불교에서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다,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 등의 주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 청풍 2011/09/27 23:32 #

    1)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에 의해서든, 아니면 내재된 마음의 발로던 간에 그것은 해야 할 선한 행위와 하지 말아야 할 악한 행위가 구별되어 있질 않습니까.. 문장 그대로,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혹은 길에 버려진 쓰레기" 는 악에 해당합니다. 님이 말하시는 화를 내느냐, 이해하고 내가 치우느냐는 선악 구별 이후에 그것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지요.

    2)아니 그건 생물학적인 구조가 각 근육에 대한 개별적인 컨트롤을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에 그렇고요...
    대부분의 경우에 비유는 훌륭한 논리전개 수단이지만, 종교나 사상, 마음의 일에 과학, 유물론적 비유를 가져오는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비슷하지만, 작용기전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3)그럼 대체 "자신의 생각" 과 "성령"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성큼이 2011/09/28 00:39 #

    제가 이야기하고싶은 것은
    자연스럽게 행동취하기 vs "~~ 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기반해 행동취하기
    의 구분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면 고정불변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상황에 맞춰서 적절히 대응하게 됩니다.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는 게 맘이 편한 상황이면 치워도 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치우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길에 쓰레기를 더 버리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괜찮습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라면 괜찮은 거라는 거죠. 걸음의 비유를 든 것은, 우리가 걸을 때 각 근육에 대한 개별적인 컨트롤을 하지 않아도 되듯이, 상황에 따른 우리의 행동이 선악 구분에 따른 개별적인 컨트롤을 하지 않아도 조화롭게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성령의 이끌림"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고, 많은 종교들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대강 설명해보려고 시도한다면, "성령의 이끌림"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겁니다. "생각"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갖고 있지 않다가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스스로 발명하거나 하는 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건 대강의 설명에 불과해서, 그 진의를 알려면 실제로 수행이나 기타 다른 무언가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고 그냥 지적인 이해만 약간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종교 체험을 해보시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기독교 쪽은 "일단 믿고 시작해라"라는 분위기라든가 창조과학이라든가 등등 때문에 거부감이 많이 들고 힘들 수 있으니 불교 쪽을 추천합니다. 저희 세대는 영어 공부는 약간 했어도 한문 공부는 거의 안해서 우리말 법문보다 영어 법문이 오히려 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청안스님이나 현각스님 같은 외국 출신 스님들 법문이 듣기 편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네요.
  • 청풍 2011/09/28 21:20 # 답글

    댓글이 길어져서 새로 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이제까지와의 입장과는 약간 차이가 생겼는데, 이전까지는 쓰레기를 치우는것이 좋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치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물론 쓰레기를 치우는것보다 훨씬 급한 일이 있다면 치우지 않는 선택을 하는게 당연하겠지만, 그건 "급한 일"이라는 외적 요인의 우선순위가 쓰레기를 치우는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겠지요. 이런 외적 요인의 개입이 아니라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현재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도덕과 상충하는데, 이것은 제가 처음 제시했던 "선악에 상관 없이 내키는대로 사는" 상황이 아닌가요.

    물론 그런 비유라는건 압니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이건 형이상항적인 내용에 대한 비유를 형이하학적인 내용으로 든 것이고, 두가지 내용의 카테고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일견 비슷해 보여도 동치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성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쪽이기 때문에 이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더 드릴 말씀이 없겠습니다. 다만 이런 의견의 개진은, 그게 성령이 있다는쪽이든, 없다는 쪽이든 기본적으로 성령의 존재를 증명, 혹은 부존을 증명하고 나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불교집안이고, 나름대로 이쪽은 잘 아는 편입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던가 "건시궐" 과 같은 화두와 "선악의 구분이 없는" 세계는 차이가 있는듯 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신 내용은 비슷한데, 원 글에서 등장한 "선악의 분별을 하지 않는" 다던가, 그것을 "성령에게 맡긴다" 는 부분은 아무래도 인간중심이고 자아의 대오각성을 추구하는 불교쪽과는 결과론적으론 비슷할 지 몰라도 근본적인 부분에서 시작을 달리하는것 같습니다.
  • 성큼이 2011/09/29 12:18 #

    불교적인 배경지식을 이미 갖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이야기가 훨씬 쉬울 수 있겠네요.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가 고정 불변의 명확한 선악 경계는 없다는 겁니다. 선업 악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업이 적절한 자리에서 작용하는 것과 적절하지 않은 자리에서 작용하는 것 뿐이라는 거죠.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기독교는 신 중심 불교는 인간 중심이라는 겁니다. 물론 시작 지점은 다릅니다만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같다고 봅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허상이고 정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없다라는 걸 깨닫는 게 주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이걸 깨달으면 고정 불변의 나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 않고, 나와 외부세계라는 최초의 구분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거죠.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기존에 내가 '나'라고 생각해서 들고 있었던 부분들을 차츰 내려놓고 최종적으로 나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일치하는 단계를 목표로 합니다. 교회 성도들을 '한 몸에서 갈라져나온 지체'와 같은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성령에 이끌려 남들도 나와 똑같이 대하는 이상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불교 기독교는 둘 다 같은 상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불교는 깊이있고 단단하지만 대중적이지 못해서, 지금까지는 출가한 스님들 말고 일반 재가자들이 그 정수를 맛보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대중이 접근해서 어느정도 맛을 보기 훨씬 쉬운 형태이지만, 깊이는 좀 부족해서 전업 사역자들도 독선에 사로잡힌다든가 엇나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듯 합니다.
  • 레니스 2011/10/04 14:11 #

    음 지나가는 기독교인인데요.
    성령의 존재를 증명,....이라고 하면 뭐랄까, 어렵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치유의 기적, (내적이든 외적이든)을 보고 그 존재를 믿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요. 뭔가 거부할수 없는 '느낌'으로 그냐 자기 자아가 '알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기본적으로는 성경을 읽고 받아들이고, 믿기로 결심을 해서 뭔가 시작되는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애매한 부분이죠. 가장 좋은 거는 정말 사람의 인격이 변하고 비젼이 생기고, 뭔가 저 사람 사는 거보니 진짜 성령(하나님?)이 계시는 거 같어. ...가 되는건데 이게 우리 모두의 소망이자 목표지만 현실은..(...흑흑)

    전 결국 모든 종교는 90%이상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내적성장과 각성 이웃에 대한 사랑 책임?등등의 관점에서요. 아 사후세계관은 좀 차이가 있지만 현세에서의 삶의 목표는요...

    선악을 분별하지 말자-라는 건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니가 신이 되지 말라. 는 건데요,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절대 선은 신..(하나님)이거든요. 쓰레기 버린다 줍는다..의 예보다 더 좋은 예는, 사람에 대한 판단 같은거요. 사람은 스스로를 판단하고 남을 판단하지만(쟤는 저래, 얘는 저래. 왜저래. 난 왜이래 등등)
    기독교에서 그걸 가장 큰 죄악으로 보거든요. 판단하지 마라. 신의 관점을 가지라.
    물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할때 청풍님께서 판단과 스스로 분별하고 결정내리는 부분을 혼돈하신게 아닌가합니다. 물론 이거 헷갈려요..(ㅠ)

    선악을 분별하기 전엔, 즉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수치감이라는 게 없었어요. 이미 선악이라는 기준이 생겨버린 사람으로서는 잘 상상이 안되는 거 같아요.....저희는 그렇게 '모든것'이 좋은 세상에서-판단하지 않고 수치심이 없고 매일매일 충만하고 자라나고 아름답게 성장하고- 더이상 살지 않고 한번도 못 살아봤으니까요.... 그냥 막연하고, 오히려 유치하게 느껴지기까지 하고.ㅠ (시니컬한 현대..)

  • 청풍 2011/10/04 22:41 #

    제가 30일부로 퇴직하고 이사하는 등 일이 좀 바빠서 본격적인 댓글이나 글은 손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고정불변은 아니지만 분명히 권장하는 일과 경계하는 일은 있습니다. 예컨대 법을 가까이 하고 탐진치를 멀리하라고 가르치죠. 온갖 보배로 공양하는것보다 경 한권을 읽어주는 법공양의 공덕이 더 크다고 가르치며 불법을 널리 알릴것을 권장합니다. 좀 후대에 섞여 들어간 부분이긴 하지만, 선업을 쌓으면 천인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쌓으면 축생, 수라, 야차, 건달바 등으로 태어난다고도 가르칩니다. 이런부분은 특히 소승불교보다 말하신 대승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지요.
    말씀하신 내용에 가까운 부분은 자신의 업장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그 업을 녹일 수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석가모니가 전생에서 한 비구를 비방한 업을 현생에서 받았을 때 자신의 힘으로 업장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화에 등장합니다.

    불교에서 "나" 를 내려놓는것은 그저 외부와의 경계를 없애는것 뿐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형성된 나 가 아닌 진아, 혹은 법신을 찾는 과정으로 압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지향점은 다릅니다. 만약 같다는 말을 하시려면 기독교는 절대적 유일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죠.
    말하자면 그 야훼란 인격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한 유일신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불, 즉 인격체가 아니라 우주의 진리(편한 설명을하기 위해 의인화한)같은것이여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신은 어떤 계시도 내리지 않고 스스로 어떤 기적도, 창조도 이뤄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내재하고 있는 성불에의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한국불교는 인도 본토에서부터 힌두교 등과 결합, 중국을 건너 한국까지 오면서 도교와 한국 토속신앙을 흡수해서 거의 다신교와 기복신앙에 가깝습니다. 대승불교가 특히 그렇고, 선종으로 불리는 소승불교쪽이 아직 본래의 견성성불과 참선의 맥을 잇고 있죠. 물론 대승이라고 해서 안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기독교 역시 한국에 들어오면서 기복신앙화 했고, 따라서 이 둘이 비슷한 상태라는건 동의합니다. 그런데 별로 좋은 의미에서 비슷한 상태인건 아니네요.
  • 청풍 2011/10/04 23:00 #

    레니스//사실 치유 등의 기적이 기독교 내에서만 일어나면 통계적으로 기독교 신의 존재를 가정할만한 근거가 될 지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리고 개개인이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건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밖으로 내놓을 어떤 주장을 하려면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어차피 인세 이상의 어떤 사후세계나 천계관은 다르지만 인세에서 착하게 살라는거야 다 같고, 그렇지 않으면 종교로서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겠죠.

    스스로 판단하는것에 대한 내용은 위에서 쓴걸로 기억합니다. 덧붙여서 저희같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더 가치를 둔다는 점도요. 다만 그점이라면 이해는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선악의 분별을 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표현하는것은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 성큼이 2011/10/06 20:33 #

    레니스// 그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성령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알리는 게 되겠죠
  • 성큼이 2011/10/06 21:15 #

    청풍// 불교에서 권장하거나 경계하는 것들은 주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같은 겁니다. 이미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도 괜찮습니다. 그 행동의 의도와 결과 부작용 등을 충분히 알고 하는 행동이니까요. 남천선사가 고양이 목을 친 공안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과 외부와의 경계를 내려놓는 것과 진아 법신을 증득하는 건 결국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

    기독교의 지향점과 불교의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고 수행이 깊어지면 직관이 강해집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죠. 이런 직관은 '나'라는 경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인격신이 내리는 계시는 이와 많이 유사합니다. 기적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깨달음이 높은 수행자들이 이른바 신통력을 보이는 사례는 많습니다. 물론 여기에 묶여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경계하고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디테일은 좀 달라도 큰 줄기는 비슷하다고 보는 게 제 관점입니다.

    소승불교는 선종이 아니라 대승불교 쪽에서 남방의 상좌부불교쪽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는 몇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을 주로 받아들이는 쪽이 상좌부불교입니다. 마하가섭등의 후대 조사들의 가르침도 받아들이는 쪽이 대승불교입니다. 깨달은 자/깨닫지 못한자, 선업/악업 등이 명확히 나눠져 있는 쪽이 상좌부불교쪽이고 궁극으로 가면 저런 경계는 없다라는 게 대승불교 쪽입니다.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게 상좌부불교의 목표라면 모든 중생이 깨닫기 전에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서원하는 쪽이 대승불교입니다.

    선불교는 대승불교가 도교의 수행법들을 흡수해서 수행 중심의 불교를 세워서 시작되는 트레디션이죠. 족보를 따지자면 상좌부불교쪽보다는 대승불교에 훨씬 가깝습니다.
  • 청풍 2011/10/06 21:39 #

    ..아뇨 어떻게 행동해도 괜찮은게 아니라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거죠... 뭐 성불하면 무루복으로 업을 맞소멸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남천선사가 조주선사를 보고 "네가 있었다면 고양이의 목숨을 구했을것을" 이라고 하죠. 저도 그자리에서 남천선사가 고양이를 죽이지 못할 도를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조주선사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간 이유도 모르지만, 그건 남천선사가 득도해서 고양이의 목을 베도 "괜찮은"건 아닙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남천선사가 고양이의 목을 벤 업은 언제가 되었든 선사에게 돌아오게 되겠지요.
    이와 관련해서 연우선사는

    [몸을 돌보지 않고 오랑캐를 소탕하리라 맹세했건만, 수많은 병사(삼천초금)가 변방에서 목숨을 잃었네. /정처없는/ 강가에 흩어진 뼈가 가련하건만, 그래도 봄이 오는 규방에서는 님의 꿈을 꾸고 있네.]

    라고 하여 남천선사가 자신이 살생계를 범하는 것을 감수하고 대중을 깨우치려 했건만 이를 알아듣는 사람이 조주선사를 제외하곤 하나 없어서 남천선사의 자기희생적 태도와 고양이의 목숨이 가련하건만, 그래도 이 공안이 후대에 내려와서 언젠가 대중을 깨우치게 되리라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또 경전에는 이런 대목도 있지요

    [설사 교학은 삼장을 통달하고 좌선은 4선(四禪)을 증득하며, 생각은 무생을 진압(鎭壓)하고, 마음은 공리(空理)를 증득하였더라도, 목숨을 보호하지 않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지니지 않는다면, 마침내 부처님의 꾸짖음을 면할 수 없다. 10악의 첫 번째 죄(살생계)를 누가 대신 받으랴.]

    그러니까 그 둘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근원에서 다르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이든, 기적이든 불교는 안에서 구하고, 기독교는바깥에서 오는것인걸요. 일전에 성령이 내재되었다고 하시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 이전에 존재한 단일 인격신을 전제하고 있는 이상 불교와 같은 지향점을 둘래야 둘 수가 없습니다.

    알려진 대로 간단하게 말했는데 제 예상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시군요.
    다만 제가 말하려는건 한국불교 및 기독교의 기복신앙화였습니다만..
  • 성큼이 2011/10/11 10:25 #

    나와 바깥세계라고 하는 구분이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고양이를 해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죠. 남천선사는 이점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하겠다라고 발심한 것이죠.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스님이 어떻게 살생을 할 수가 있지?! 라고 열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죠. ~~해서는 안된다"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안과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불교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죠. 환상이라고는 해도 우리 모두가 거기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그 구분의 영향력 아래에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다만 불교는 안에서 기독교는 바깥에서 출발하는 것 뿐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마침내 안과 바깥이라는 구분이 환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성경에서 사람이 신을 닮도록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게 되죠.
  • 청풍 2011/10/11 13:00 #

    해서는 안되는것 맞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천선사는 그게 해선 안되는 살생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후학에게 도를 깨우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를 범하는 업을 감수하고 고양이를 죽인거죠. 또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천선사의 참묘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것과 참묘행위가 잘못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쓰신 글에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나오는데, 불교는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신을 닮게 창조되었다고는 더더욱 믿지 않고요.
  • 성큼이 2011/10/18 10:23 #

    해야되는 것/하지말아야 되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주장하는 절대론적 윤리설 입장에 서 계시는군요. 저는 절대론적 윤리설 혹은 상대론적 윤리설 어느 게 옳다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절대론적 윤리설을 들고 있을 때, 그러니까 "~~해야 한다"라는 기준을 맘 속에 품고 있을 때 스스로의 맘의 평안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창조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셨음을 지적하고 싶네요. 불교에서는 '나'의 본질과 세상만물의 본질이 같은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저 같은 공기를 서로 다른 폐로 들여마시는 중인 것과 같지요. 혹은 길죽한 시험관과 납작한 접시에 담겨진 물이 다 같은 물이라는 비유도 가능하겠구요.

    기독교에서 사람을 신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한 통찰을 전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만물에 불성이 있다라고 이야기할 때 전하고자 하는 통찰과 똑같은 통찰을 전하기 위한 겁니다.

    제 설명이 충분히 시원하지 못하게 느껴지신다면, 수행을 많이 쌓고 깨달음이 높으신 스님들의 견해를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이 절대론적 윤리설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시는지.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시는지 들어보십쇼. 아마도 저보다 훨씬 와닿게 설명하실거라 생각됩니다.
  • 청풍 2011/10/18 11:31 #

    남천선사의 일화에 대한 이 평가/분석은 제가 한게 아닙니다. 세상에는 변하는 가치가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습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거 같은데, 저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입장과 그 신의 현세 개입에 대한 부분에서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하고 있는겁니다.
  • 성큼이 2011/10/18 13:07 #

    네 좋습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세상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지금까지 사회를 그럭저럭 안정시켜 온 긍정적인 역할이 있죠. 다만 "모두가 긍정하는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존재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구요.

    저도 유일신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고, 유일신의 존재를 밑에 깔고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기독교의 이야기들 속에 불교적인 관점으로 긍정할 수 있는 가치와 지혜들이 그 기반으로 깔려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 청풍 2011/10/18 13:36 #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평등 등은 60억이 넘는 인간 한명 한명이 공감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보편타당한 전인류적 가치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전 세계에 단 한명도 이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제가 지금까지 헛수고를 한거겠죠.

    저는 그걸 우연, 혹은 끼워맞추기 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큰 틀로 봐서 종교라는 특성상 공유하는 몇가지 가치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애당초 출발점이 다르고, 중심점이 다른종교입니다. 그래서 몇가지 가치를 공유하거나 일치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의 궁극점이나 추구점은 절대 같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겁니다.
  • 성큼이 2011/10/18 17:39 #

    보편타당한 가치라고 하는 것은 요리로 비유하자면 레시피에 해당합니다.

    컨택스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전문 요리사는 레시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이 상황에 따라서 직관적으로 적절하게 요리를 해 냅니다. 전문가가 레시피에 구애받으면서 다음으로는 이게 있어야되는데 하고 파닥거린다면 전문가가 아니겠지요. 무협소설로 치자면 초식에 얽매이지 않는 고수랄까요.

    반면 초보자는 컨텍스트에 독립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원칙들이 있어야 그래도 요리 비스무레한 걸 할 수 있죠. 상황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정된 인지적 자원을 레시피에 집중해야 겨우 무언가를 수행해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인류 대부분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초보 레벨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디서 괴로움이 일어나고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죠. 이른바 보편타당한 가치라고 하는 건 이런 상황에서 레시피 역할을 해 줍니다. 앞뒤 상황을 다 파악 못해도 대강 이 보편 가치를 따르다보면 큰 괴로움은 피할 수 있는 거죠.

    보통 종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영감과 통찰을 품고 시작합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들이 제시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영감과 통찰 자체는 끊어지고 방법들만 남습니다. 때로는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왜곡시키기도 하죠. 그러다 다시 영감과 통찰을 지닌 이가 나타나 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지나고 다시 왜곡과 변질이 시작됩니다. 브라만-불교 쪽이든 유대-기독교 쪽이든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왔다고 봅니다. 다만 왜곡이 되더라도 그 뿌리에 깊이 박혀있는 영감과 통찰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읽어낼 수 있고, 복원해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청풍 2011/10/18 19:50 #

    요리를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는건 "적힌 레시피"를 보지 않아도 적당한 양과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것이지, 레시피에서 벗어나고도 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것은 아니죠. 아무리 고수 요리사라도 한시간 졸여야 하는 음식을 두시간 불 위에 얹어두면 태워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감(사실은 영감이나 통찰이라기보단 상상에 가깝습니다)의 시작부터가 다르다니까요... 번개가 치는 하나의 현상을 보고도 누군가는 번개의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했지만, 누군가는 전지전능한 하나의 신이 번개조차 부리는거라고 믿었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두 종교는 출발점부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까지가 다 다르다고 했지요. 결코 통합될 수 없는 교리를 가진 두 종교에서 일부 존재하는 비슷한 점일 뿐인데요.
  • 성큼이 2011/10/18 21:41 #

    상황에 따라서는 두 시간을 졸여야만 요리가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약한 불밖에 못쓰는 상황이라든가 주변 기온이 너무 낮다든가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죠. 이런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으면 이미 레시피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레벨과는 큰 차이가 나죠.

    제가 선악을 분별하면 지옥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던 건, 다시 레시피의 비유로 돌아가자면 레시피를 절대시하면서 "이 레시피가 옳아! 이 레시피가 선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레시피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보면 분노합니다. 상황변화 때문에 스스로 그 레시피를 지킬 수 없게 되면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레시피는 레시피일 뿐이죠. 그저 대강의 지침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괴로워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과 불경을 접해보면 예수님과 부처님이 정확히 동일한 영감, 동일한 지혜를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맘 속 깊숙이 묻어두고 보려하지 않는, 언어로는 정확히 전달할 수 없는 그 진리를 얻으신 거죠. 다만 두 분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회에서 태어났고,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기존 문화적 배경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하고, 예수님은 일신교인 유대교의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했던 거죠. 출발하는 지점은 달라도 두 분은 똑같은 목적지로 인도하려고 시도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도 사랑하기,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은 그냥 그렇게 살려고 애쓴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상태는 수만가지 말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결국 동일한 한 가지 상태입니다.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두 분이 인도하시는 거죠.
  • 청풍 2011/10/24 22:19 #

    그래서 레시피는 "중불로" 와 같은 조건을 달아놓습니다. 중불로 10분만 살짝 끓이라고 했는데 중불로 2시간을 끓이면 태워먹는건 당연하고, 그건 레시피에 맞다 틀리다가 없는게 아니라 그냥 틀린 레시피죠. 선악 구별이 없다는 말을 레시피에 비유하려면 요리를 할 때 소금이나 설탕의 비율이 얼마가 되든, 태워먹든 설익히든 그것은 훌륭한 요리다 라는 말입니다. 어떤 실수로 새로운 요리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마어마하게 짠 된장찌개나 다 타버린 파스타를 보면 요리를 잘못했다고 하지요.

    유신론을 정면에서 부정한 부처와 신의 아들을 자처한 예수가 어떻게 완전히 같은 깨달음인가요. 제가 다시 말하지만, 종교가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공통된 가치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던가, 자비로 상대를 대하라던가.. 이런 간단한 규율등을 넘어서 좀 더 복잡하고 철학적인 부분에서도 공통점이 생길수는 있죠. 어차피 예수가 신의 아들이든 아니든 후대에 그걸 종교로서 잇고 이끌어온건 불교나 기독교나 똑같은 인간 사제니까요.
    하지만 이 둘은 발생기원과 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부정 여부 등 아주 굵직하고 중요한 교리에서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향점에 교집합이 있을수는 있어도 완전히 같은것만을 지향할 수는 없어요.
  • 성큼이 2011/10/28 11:26 #

    선악 관점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제 인과율이 명확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불 위에 오래 가열하면 불탄다 라는 게 그런 인과율 중 하나겠죠. 아무리 깨달음을 얻어도 우주의 인과율에서는 물론 벗어날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제 인과율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걸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히 이용하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 인과율이라는 것은 선악을 구분짓는 가치판단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도달한 진리라고 하는 건 어차피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걸 말로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미 실수죠. 하지만 그 실수를 통해서라도 가르치려 하셨던 겁니다. 이를테면 대승불교의 발명품인 불성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불성이란 게 존재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저 가르침을 위한 하나의 방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죠.

    언어를 통한 설명이나 묘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임시방편으로 내 놓은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지점은 정확히 같습니다. 어차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그것 밖에는 없으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들은 제가 시간이 좀 나면 제대로 연재글을 통해서 해 보겠습니다.
  • 청풍 2011/11/03 10:18 #

    인과율이라니요. 저는 선악구별을 위해 음식비유를 들었는데 그걸 왜 인과율로 설명을 하십니까. 게다가 인과율이라건, 지금 말하시는걸 보니 과학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업과 같은걸 말하시는듯 한데, 그건 이용하는것도 아니고, 선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편리한 탈출구도 아닙니다. 물론 애당초 그 인과율이라는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부터 의심해 봐야 하지만요.

    제가 다시한번만 더 말하겠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야훼라는 전능한 유일인격신의 존재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라는 아주 중요하고도 핵심적이며 근본적인 교리에서 완벽하게 반대방향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을 설명이나 교리적 반박으로 하려 하지 않으시고,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 고 하시는데, 제가볼때 이건 불립문자를 이용한 회피에 불과합니다.
  • 성큼이 2011/11/03 15:41 #

    선악 구분은 기본적으로 가치 판단입니다. 거기서 넘어서서 사실명제들 이를테면 충분히 열을 가하면 음식이 탄다 와 같은 것들은 선악 구분과는 별개의 진술들이죠. 불교에서 다루는 인과율은 자연과학의 인과율들을 포함하고, 자연과학에서 다루지 않는 인과율들도 이야기합니다.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은 물론 믿을 필요는 없고 수행을 해 보면서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면 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물론 유일인격신에 대한 긍정입니다만, 불교의 핵심은 유일인격신에 대한 부정이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아는 것이 핵심이죠. 불립문자로 회피한다고 주장하시니 말로 조금 더 설명을 드리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걸 설명하는 실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단은 그 실수를 이용해보도록 하죠.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지내는 모든 요소들, 몸, 감각, 감정, 충동, 의식, 과거, 현재, 미래, 등등등의 것들은 사실은 전부 내가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 저런 각각의 요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걸 경험하게 되는데, 진짜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니 저 모든 요소들은 전부 진짜 내가 아닙니다. 진짜 나라면 잠깐이라도 없어질 수가 없겠죠. 그렇게 해서 진정한 나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동시에 깨달아지는 것이, 나의 본질과 우주만물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걸 가리켜서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죠.

    그럼 다시 돌아가보죠. 애초에 불교의 주장은 나와 외부세계라는 분리도 없고 물질과 정신이라는 분리도 없다는 겁니다. 불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구요. 하지만 여기까지 바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가르치기 위한 개념으로 도입한겁니다.

    그러면 깨달음이 저 정도로 깊어져야만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죠. 중간단계 레벨 정도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기독교의 세계관, 그러니까 나/인격신/우주 로 구분지어서 인식하는 이 세계관은 불교에서 보아도 충분히 그 유용성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인격을 갖고 있고 나의 본질이 인격을 갖고 있고 우주 만물의 본질이 나의 본질과 같다면, 우주 만물에 인격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인 세계관이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인격이라고 하는 부분 즉 정신적인 부분을 물질적인 부분과 구분지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바라보고 파악하게 되면 그게 기독교의 세계관, 나/인격신/우주의 세계관이 됩니다.

    '나'라고 하는 개의식 상태에서 잠깐 벗어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스님들의 수준이 아니라면 어렵습니다. 어차피 그 상태를 지속시키지 못할 거라고 포기하고 한 발 물러섰을 때 나/인격신/우주를 구분짓는 기독교의 세계관은 잘 살기 위한 강력한 지지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탐진치에 빠져서 도무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성령과의 대화와 교감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니까요.

    정리하겠습니다. 기독교 불교는 둘 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히 사람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불교에서는 더 깊은 궁극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이 깨달음에 도달해서 유지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강력한 대중을 일으킬 수 있고, 불교는 소수의 깊이 깨우친 수행자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분명 목표와 양상에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둘을 같은 뱡향으로 이끄려는 목표를 가진 가르침으로 봅니다.
  • 청풍 2011/11/03 15:52 #

    또 중요한 부분에서 말이 돌아가는데요, 불교가 전능유일신을 인정합니까 안합니까?
    제가 핵심교리라고 해서 "불교의 핵심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나가시는데, 저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 를 말하려고 한게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제 말은
    전능한 유일신의 인정이냐 아니냐의 중요한 부분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교리를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공유하는 가치는 있을 수 있지만, 두 종교가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는겁니다.

    그리고 음식을 불에 올리면 탄다는것은 "올바른 레시피" 로 선악구별의 비유를 들기 위함이었지 음식을 불에 올리면 탄다는 "사실"이 가치판단이냐 사실판단이냐는 얘기를 하기 위한게 아니었다고 이미 말 했고, 이 전까지만해도 그 비유를 함께 공유해서 논쟁하셨으면서 왜 갑자기 그걸 사실판단과 인과관계의 문제로 끌어들이십니까?
  • 성큼이 2011/11/03 17:13 #

    불교적인 관점에서 나/인격신/우주를 구분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유용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정확하냐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겠지요.
    정말 불성이란 게 존재하느냐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가치 판단에 집착하게 되면 suffering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레시피의 비유는 컨텍스트에 관한 지식 없이 초보자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틀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레시피 자체에 집착하는 경우는 많이 없어서
    레시피가 불러일으키는 suffering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들어가면 잘 안 와닿습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 관해서는 논의가 제자리에 놓이게 되어서
    이 부분에 문제가 있느냐는 걸 다시 이야기해드린 겁니다.
  • 청풍 2011/11/03 17:19 #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본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지향점이 같다고 말할 수 없다는겁니다. 제가 공유하는 가치는 있을 수 있다고 계속 말했죠?

    선악의 가치판단에 집착하라고는 안했습니다. 선악의 가치가 없는게 아니라고 했지.
  • 성큼이 2011/11/03 17:50 #

    불성이 진짜 존재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가 된다는 겁니다.
    불성이 진짜 존재한다 vs 불성이 진짜 존재한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지만 유용하다
    저는 이 두 입장이 지향점이 같다고 보는데 그렇게 보시지 않으신다면 관점 차이겠지요.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 서면 마음 상태가 좀 나빠져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채널을 열어 주기 때문에 유용한 거구요.

    네 선악 가치 판단에 집착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 판단을 잘 쓰면 레시피처럼 유용하게 쓸 수 있죠.
    집착하면 지옥이 펼쳐지는 거구요.
  • 청풍 2011/11/03 17:51 #

    ...어떻게 하면 "존재한다" 와 "존재하지 않는다" 가 같은 지향점이 됩니까...
  • 성큼이 2011/11/03 23:16 #

    있다고 믿고 들어가는 것의 유용성을 양측 다 인정하는 거니까요.
  • 청풍 2011/11/05 17:38 #

    유용성을 인정하는것과 같은 것을 지향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데요.

    게다가 불교는 전능한 유일인격신의 존재를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존우작화인론이라는 3종외도의 하나로 배척하고 있고요.
  • 2011/10/04 13: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니스 2011/10/04 14:00 # 답글

    지나가는 기독교인인데요^^
    물론 창조과학의 어그로..흑흑. 인정합니다. 근데 '문자그대로 해석'이 문제 있다라는 말씀도 그닥 동의하기 어려운게...
    전체적으로 님의 철저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것이 타당하다'라는 게 은근 대놓고 기독교-개독교 라는거 보다 좀 더 불편하네요.
    제가 볼때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문제가 되기 보다는 그냥 자기한테 맞춰서 문자를 해석하는게 더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언뜻 들어보면 문자그대로 믿는 거 같지만 대부분 '일부내용'을 보면서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오류를 많이들 범하고 있거든요. 치우쳐진 관점?이랄까.
    원래 종교가 유사한 점 많은 건 맞는 말씀이지만. 기독교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마음이 일치하는 단계뿐 아니라 나의 의지도 중요합니다. '함께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예요. 그리고 성령뿐아니라 성부의 뜻 성자의 구체적으로 드러난 삶과 말씀을 같이 보면서 따라가는 것. 제가 느끼기엔 님께서 아직 기독교의 정수에 대해 어느정도 이론은 이해하고 계시지만 경험은 많이 안 해보신 것 같습니다.
  • 성큼이 2011/10/06 21:20 #

    네 결국 성령의 인도 없이 성경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문제가 생겨난다고 봅니다. 나의 의지도 물론 중요하죠. 성령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선택과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경험이 짧긴 합니다 ^^; 더 경험해봐야겠죠.
  • 2011/10/04 14: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임형준 2011/12/18 14:40 # 삭제 답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생긴다 라고 하셨는데
    볼륜을 한 부녀자를 돌로 떄려 죽여라, 이도교들을 때려 죽여라,
    천사들을 강간하려는 폭도들에게 자신의 처녀 딸을 던져주거나, 자신의 늙은 손님을 강간하려는 폭도들에게 제 딸과 손님의 아내를 던져주어 밤새 강간당하고 결국은 죽게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죽은 아내를 정조를 잃은 더러운 여자라 여기며 12도막으로 잘라 바다에 던져넣었다는 구문을 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윤리적으로 옳은 절대적 진실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지배를 위한 책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가르침은 집단 내부의 사람들은 관용으로 덮어줄 지 모르나,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고, 또한 외부로부터의 의식(생각)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역할을 하여 집단에 영속되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입니다.
  • 성큼이 2011/12/19 20:02 #

    성경에는 온갖 막장스러운 상황과 인물과 범죄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걸 따라하라고 적혀있는 건 아니죠.

    외부인에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족속들이라고 교만해하는 내용들이 구약 성경에 나와 있긴 합니다만 이런 부분을 개선하고 혁파하는 내용으로 신약 성경이 붙여져서 복음을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무조건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도 없습니다. 잘 활용하면 되는 거죠. 예수님은 기존의 유태교 세계관을 뒤엎어버리기 보다는 적절히 살을 붙이고 고칠 건 고치셔서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는 데에 잘 활용하셨습니다.
  • 임형준 2011/12/18 14:43 # 삭제 답글

    성경을 우회적으로 해석한다는 생각이 과연 종교의 중심부에게 있어서 옳은 행위로 받아들여질 지 의심됩니다.
    물론 성경은 우화로 받아들이고 그 속의 좋은 교훈들을 수용한다면, 그보다 더 종교를 유익하게 사용할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만, 많은 이들이 성경은 절대적 진실이라 받아들이고 지구가 생겨난지(종교인들에게 있어선 만들어진지) 1만년이 채 안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과반수를 넘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죠.
  • 성큼이 2011/12/19 20:13 #

    성경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옿다는 시각은 유명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서 오래 전부터 수많은 교회 리더들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원리주의 종파들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있긴 합니다만 이런 원리주의자들이 많은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 미국 정도에 지나지 않고, 전체 기독교 역사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 임형준 2011/12/20 19:48 # 삭제

    리처드 도킨스였는지 조지 칼린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성경을 자의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왜 성경이 필요한가? 라고 했죠. 스스로 윤리를 탐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요.
  • 성큼이 2011/12/21 09:43 #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영감을 주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과학도 마찬가지인데, 관측자료들만 있으면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이론적으로는
    스스로 유도해낼 수 있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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